잊지 말자, 기억하자, 9.11
9월 11일 화요일 아침 가게로 나갈 준비를 하고있는 8시경이였습니다.
누군가가 "빨리 TV를 켜 보세요"라는 전화였습니다.
부랴부랴 TV를 켜니 뉴욕의 무역센터에 여객기가 박혀 있고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조종사가 실수를 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한대의 여객기가 날라오고
있었습니다. 쌍둥이 빌딩 다른 건물로 다른 여객기가 상층부에 가서 박히는 것이 었습니다.
조금 후 빌딩은 검은 연기를 내면서 아니지 무슨 먼지를 내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화면에 가득히 보이면서 사람들은 우왕좌왕 야단들이였습니다. 미국이 테러를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9.11 테러 사건의 상황을 중계로 본 것이였습니다.
출처: 조선닷컴
우주에서 본 9.11테러 당사 장면
출처: 미 항공우주국(NASA)
2001년이었으니 꼭 10년이 지난 세월입니다. 정말 잊지 못할 날이였습니다.
여객기 납치로 동시다발 테러로 인해 미국의 심장부 뉴욕 그것도 가장 높다는 쌍둥이 빌딩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을 겨냥했으니 건물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이였습니다. 이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 2974 명의 죽음까지 말입니다.
그보다 꼭 60년 전의 일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도 그랬습니다.
'도라 도라 도라'라는 유명한 공격 암호와 함께 새벽 진주만 폭격으로 12 척의 군함이 수장되고
수많은 다른 군함도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전투기와 비행기 188대가 부서지고 헤군 2403 명과
민간인 68 명의 죽음을 앗아간 것입니다. 꼭 60년 전의 대참극이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 이 날을 잊지 말자"하고 경각심을 주었지만 또 당한 것입니다.
말이 3천명 죽음이지 한꺼번에 이만한 사람들의 죽음은 정말 나라의 재난이였습니다.
하와이 진주만 공습 이후 그곳엔 "잊지 말자"란 표어를 붙여 두었다 하여도 간첩 한사람 잡기 위해
1개 사단을 동원하여도 어렵고 도둑 한놈을 잡기 위해 열 사람이 지켜도 사실 도리가 없듯이
아무리 표어를 붙인다 해도 주의하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를 방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미국 경제가 이렇게 나빠진 이유도 테러와의 전쟁에 많은 전비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경제가 나빠지니 세계 경제도 동반 하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론 포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부나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
국가 안보를 위해 힘을 합해야 할 것입니다. "잊지 말자, 기억하자 9.11"
아래는 오바마 추모연설
출처: AP연합뉴스
9·11 10주기를 맞아, 미국의 조지 W 부시 전(前)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당시 이슬람 수니파의 극단주의 테러집단인 알 카에다가
3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뉴욕 맨해튼 남부의 ‘그라운드 제로’에 함께 섰다. 오바마 대통령과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이
한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9년 1월 20일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이후 처음이라고 미국 언론은 전했다.
두 전현직 대통령과 유가족, 뉴요커들은 11일 납치된 여객기를 동원한 첫 충돌 테러가 발생한 오전 8시46분 블룸버그 뉴욕 시장의
인도로 희생자를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그라운드제로에는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울려 퍼졌다.
단상에 선 오바마 대통령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로
시작하는 구약성경 시편 46편을 낭독하는 것 외에 다른 발언은 하지 않았다.
부시 전 대통령은 1864년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으로 다섯명의 아들을 잃은 리디아 빅스비(Bixby) 여사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빅스비 여사의 다섯 아들은 북군에 참여해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링컨은 편지에서
"나는 어떤 말로도 소중한 것을 잃은 당신의 슬픔을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하려 했던 이 나라 전체가 감사한다는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적어도 9·11테러 10주년이 열린 이날만큼은 민주·공화 양당은 당파성을 띠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911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이슬람 자체를 공격 목표로 삼지 않은 점은 매우 잘했다고 칭송했다. 오바마는 이날 테러범들을
“이슬람주의자들” “알 카에다 멤버”라는 표현으로 지칭하지 않았다. 그저 테러범들을 “사악한 살인범들(hateful killers)”라고만 했다.
다음은 9.11 피랍기에 자폭임무 맡았던 조종사 이야기입니다.
非무장으로 피랍 여객기 격추 위해 긴급 출격
“납치범 제압한 승객들이 진정한 영웅” 겸손
10년 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헤더 '럭키' 페니 소위는 워싱턴 D.C.에 있던 자신의 부대에서
유일한 여성 전투기 조종사이자 경험 없는 신출내기였다.
그런 페니 소위에게 목숨을 건 막중한 임무가 떨어졌다.
테러범들에게 공중 납치돼 수도로 향하던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페니 소위와 동료가 탄 F-16 전투기 2대가 출격했지만,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긴급 출격하느라
F-16 전투기에는 미사일 등 항공기를 격추할 무기가 탑재되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비행기를 격추하는 게 아니라 들이받으려 했다"며 "내가 가미카제 조종사가 되는 게 임무였다"고
최근 워싱턴포스트(WP)에 회고했다.
이들은 첫 번째 비행기가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WTC)를 들이받았을 때만 해도 미숙한 경비행기 조종사가
사고를 낸 것으로 여겼으나 두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히자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 막 훈련비행을 마친 전투기에는 공포탄만 장착돼 있을 뿐 무장된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다.
미사일 등 무장을 갖추는 데 1시간가량 걸리는데 피랍 보잉 757 여객기는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어
무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군가는 즉각 출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크 새서빌 대령은 "러키, 나와 같이 간다"고 페니 소위에게 명령했다.
출격 직전 새서빌 대령이 조종석 쪽을 노리겠다고 하자 페니 소위는 그러면 자신은
피랍 여객기의 꼬리 부분을 겨냥하겠다고 주저 없이 답했다.
엔진을 공격하더라도 여객기가 활강하며 목표 지점까지 갈 수 있다는 게 새서빌 대령의 판단이었다.
비행 전 30분 정도 소요되는 일상적인 점검 절차를 생략하고 새서빌 대령과 페니 소위는 엔진의 출력을 높여 시속 640㎞로 날아올랐다.
새서빌 대령은 전투기로 피랍 여객기를 들이받기 직전 비상 탈출을 하는 것도 고려했다고 WP에 놨지만,
페니 소위는 "비상 탈출하면 전투기가 떠오르면서 목표물(여객기)을 타격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서빌 대령과 페니 소위는 소중한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인질로 붙잡혔던 유나이티드 93편 승객들이 테러범들과 싸우는 와중에 비행기가 펜실베이니아 주(州) 시골에 추락했기 때문이다.
페니 소위는 "진정한 영웅은 목숨을 기꺼이 바친 유나이티드항공 93편의 승객들"이라며 "
나는 역사의 우연한 목격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베트남전쟁에서 싸운 조종사의 딸로 1세대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된 그는 이라크전에 두 차례 파견돼 참전했으며
현재 주 방위군 소속 소령으로 전투기를 몰지 않으며 혼자 두 딸을 키우고 있다.
9.11에 관한 숨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습니다.
목숨을 바친 3천야명의 영령들에게 고개 숙여 묵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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