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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터키 여행

소아시아 7대 교회 성지 순례 [Bohemian Vlog 터키 여행 5]

 

 

고대 7대 불가사의 아데미 신전과 소아시아 7대 교회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묵시 1,11). 성경 말씀 처럼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소아시아 7대 교회를 순례하시갰습니다.

 

 


YouTube Bohemian Vlog를 통해 소아시아 7대 교회를 성지순례하세겠습니다.



제일 먼저 필라델피아의 성 요한 교회 유적지를 방문하시겠습니다.

 

 

파묵칼레 북서쪽으로 자리 잡은 필라델피아의 성 요한 교회 유적지

필라델피아 교회는 요한 묵시록 첫 장에 등장하는 7개 교회 중 하나다.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묵시 1,11).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여섯 번째로 소개된 필라델피아 교회는

칭찬만 받은 모범적인 교회였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보라, 나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네 앞에 열어 두었다. 너는 힘이 약한데도, 내 말을 굳게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묵시 3,8).

 

 

 

두번째로 사대교회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사데 교회 유직지 앞에서

 

 

사데교회 내부
 사데는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데미 여신전 유적지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이 신전은 ‘다산(多産)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장한 규모이다. 지금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석주들이

도열해 있고 특별히 이오니아식의 석주들이 18m나 되는 높이로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채 남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아데미 신전은 당시 희랍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였으며, 크기는 188m×58m의 규모로 56개의 석주가 들어서 있었다. 신전 후면의 작은 비잔틴 교회와 연관 지어서 한때 교회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건축이 중단된 채로 남아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의 건축 공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터키 버가모 Red Basilica

Red Hall과 Red Courtyard라고도 불리는 "Red Basilica"는

터키 서부의 베르 가마에있는 페르가몬의 고대 도시입니다. 성전은 로마 제국 시대,

아마도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그의 명령에 따라 지어졌습니다. 버가모에는 붉은 색의 초기 기독교 교회당이 있다.

이곳은 기원후 2,3세기 경에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를 섬기던 거대한 신전이었는데, 그 후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

교회당으로 바뀌었다. 이 붉은 대 교회당은 처음엔 흰 대리석으로 둘러쌓였는데 지금은 겉이 다 떨어져버리고

바닥의 대리석만 남아있다. 건물 벽에 붉은 벽돌 만 남아있어 레드 바실리카로 불리는 것 같다.

 

 

Bergama 의  Red Hall  (Kızıl Avlu)  또는  Red Basilica는 이집트 종교가 로마 제국에 도달했을

때인 2 세기에  이집트 신인 Serapis, Isis  및 Harpocrates 를 숭배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열주로 둘러싸인 거대한 건물은 로마  시대에 매우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아래에는 돌로 된 수로가 흐르고 그 물은 의식 목욕과 재계에 사용되었습니다.

 

 

두아디라는 루디아의 고향이다.
사도행전 16장 11절  15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빌립보에서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를

만난다. 예로부터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했던 티아 티라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마케도니아의 빌립보(Philippi) 외곽에서 만난 옷감장수 리디아(Lydia)가 이곳 두아디라 출신의 상인이었다. 리디아는 장사하는

여자로 하나님을 공경하던 믿음이 독실한 여자였다(행 16" 11 -15).  

 

 

두아디라 교회는

루디아가 빌립보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고향에 세운 교회다.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80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두아디라는 주변에 흐르는

루크스(Lycus강을 끼고 있어서 비옥하여 목축업이 성행했다. 그리고 기능공 숙련공으로 구리세공,

자주색 옷감 염색이 발달했다. 군사적 요충지로 외세의 많은 침략 때문에 기원전 1세기까지

지속적으로 평화를 맛볼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세계 평화 정책에 의해 그러한 상황이

평정되었고 상업과 제조업을 중개하는 무역의 통로가 되었다.

 

 

버가모(Pergamum)와 사데(Sardis) 사이에 위치한 두아디라(Thyatira)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작은 도시중 하나였다.

서로 다른 시대였으면서도 매우 강성했던 두 왕국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관계로 두 지역의 중요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지금은 아크히살(Akhisar)이라고 부르는데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고대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새로운 도시 분위기만 물씬 풍기고 있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 7개 교회 중 가장 많은 책망을 받은 교회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주님의 책망을 받았던 교회였다. 고대도시 라오디게아 유적지에는 아치형 건물의 잔해와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

2개의 극장 등의 흔적을 돌아볼 수 있다. 라오디게아에 복음을 전한 이는 사도 바울의 선교 동역자인 에바브라였다.

라오디게아 시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볼리가 있다. 많은 양의 석회질이

오래동안 물속에 침전돼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비경이다. 약 100m 높이에 이르는 백색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자연 장관은 멀리서 보면 마치 만발한 목화송이로 뒤덮인것 같아 '목화성'이란 뜻의 '파묵칼레'로 불린다.

 

 

라오디게아의 수많은 유적지들은 지진으로 인해 붕괴됐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는 한참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고 현재의 모습은 지진으로 인해 덮여졌던 흙을 걷어낸 후 발굴해낸 모습으로

지하에 많은 유적들을 마치 창고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교회 유작지를 복원하기위해 유리 지붕을 하고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기독교 유적을 복원함은 모두가 관광객 유치의 큰 뜻이 있음이다.

 

 

사도 요한이 숨진 곳, 셀축의 사도 요한 교회

사도 요한 교회는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이다. 이 웅장한 돌은 어디서 가져 왔을까.

3.5km 떨어진 에페수스(Ephesus) 유적지와 근처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12 사도중 한사람인 사도 요한을 기리기 위해 서기 548년부터 565년까지

17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동로마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확장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가

사도 요한의 무덤을 교회로 만들라는 명령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에페수스의 주교

히파티우스(Hypatius)가 공사를 지휘했다.

 

 

사도 요한 무덤 표지석

사도 요한의 무덤은 교회 동쪽 끝에 있다. 네 개의 기둥이 세워진 그의 무덤

대리석 석판에는 “이곳은 나의 영원한 쉴자리, 여기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글귀가 있다.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은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저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후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모신 성자였다. 그리스도는 죽기 전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수스로 왔다.

 

 

박해의 문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부분을 에베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기던 3-4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