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국 방문/정동진 삼척 속초

오죽헌과 허난실 생가 그리고 경포호 벚꽃길 [깅릉 모국방문여행]

 

강릉 오죽헌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있는 조선전기 율곡 이이 관련 주택이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 있는 별당 건물로,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며 포의 구성 방식이 주심포에서 익공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를 보여준다. 본가는 1995년에 복원된 건물이며, 본가와는 다르게 동남향하고 있는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주거 건물로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온돌방, 툇마루로 된 일자형 건물이다.

YouTube Bohemian Vlog로 오죽헌 신흥사 남이섬 동영상을 보시겠습니다.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 고택이라고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에 많이 나타나는 
별당과 그 평면형식을 같이 한다.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최응현의 집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이사온과 같이 살던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는 딸이 다섯 있었는데, 둘째 딸인 신사임당은
덕수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고, 넷째 딸은 안동권씨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이사온의 집을 물려받은 신명화의 부인 용인이씨는 외손인 이이와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오죽헌이 속해 있는 고택은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권처균에게 분재되었다.
이때부터 이 고택의 소유권은 안동권씨 집안의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허난설헌은 조선전기 『난설헌집』을 저술한 시인이다.
1563년(명종 18)에 태어나 1589년(선조 22)에 사망했다. 허균의 누이로, 문장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오빠·동생의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원만치 않은 부부생활,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고독한 삶을 보내며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임종 때의 유언에 따라 작품은 모두 소각되었는데,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건넨 작품 일부가 그녀의 사후 중국에서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신선세계를 동경하는 내용의 작품이 절반 이상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엽(曄), 오빠는 
봉(篈), 남동생은 균(筠)이다.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가문으로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했다.
엽이 첫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 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과 혼인해 봉 · 초희 · 균 3남매를 두었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安東) 김씨(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했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비극이 연속됐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며 불우하게 살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