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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행/일본

연못에 일렁이는 금빛 찬란한 금각사 [교토 일본여행]

 

금각사는

1950년 21살의 학승에 의해 완전히 불탄 적이 있다. 승려의 어머니는 강물에 투신했고,
불을 지른 청년도 6년 뒤 생을 마감했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정신질환’을 언급했지만, 진짜 방화 동기는
소설과 다큐멘터리 제작으로도 모자랄 만큼 일본인들의 수수께끼였다. 지금의 금각은 1956년 재건된 것이다.
실측조사자료가 남아 있어 거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타기 전의 금각은 패전 직후의
고단한 일본처럼 금칠이 거의 벗겨진 ‘퇴락한’ 모습이었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잿더미가 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찬란한 금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금각사의 상징 같은 금각은 1397년 당시 일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집무처 겸 영빈관으로 지은 별장의 황금누각
이다. 일본 중세의 화려한 귀족문화를 뜻하는 ‘기타야마 문화’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1950년 방화로 전소된 뒤
새로
지어졌으나, 기록에 근거한 ‘완전한 복원’이란 점에 힘입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아무튼 금각은 화려함을 되찾았지만(20㎏ 이상의 금이 사용됐다고 한다), 강렬한 세속성의 황금빛을 천박하게 여긴
일본인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금각의 휘황함에서 인생의 허무를 읽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육주의 송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금각사의 배 모양 소나무(리쿠슈노마쓰). 쇼군이 좋아한 분재를 옮겨다가 돛을 단 배 형상으로
가꾼 것이라고 전해진다.  종교적 피안을 상징한다.

금각사 옆에는 옆으로 누운 고송이 한그루 서있다. 교토 3대 소나무중 하나로
"
육주의 송:뭍에 올라온 배 형상 소나무"이라고 한다.

금각사는 무로마치막부 3대 쇼군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1397년 지은 산장에서 유래했다.
아시카가는 당시 ‘천하 장관’이라고 불렸다는 한 고위 귀족의 화려 장대한 별장을 인수해 자신의 스타일로
고쳐 집무처이자 영빈관으로 삼았다. 절대권력자의 무소불위를 보여주는 ‘건축 행위’였다.
아무리 단일건물이라 해도 전체를 금으로 덮는다는 발상은 막강한 권력과
재력이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사무라이 출신의 절대권력자 아시카가는 상위계급인 왕실 귀족문화를 동경하다 못해 종교(선불교)의 권위를 끌어들여
그 벽을 뛰어넘으려 했다. 일본의 일부 사가는 실제로 아시카가가 쇼군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덴노’(왕)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고 본다. 

누각의 황금빛과 실내 배치는 그 끝없는 욕망의 표현이다. 금칠이 없는 1층은 왕실의 침전을,
금빛의 2층과 3층은 각각 무가(武家)의 불전과 중국 선종사원 양식을 하고 있다.왕족의 명예,
막부의 권력, 법황의 권위라는, 현세의 모든 ‘파워’를 한 몸에 지니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세의 유복을 바라는 보통사람들은 그 숨 막히는 아름다움 앞에서 위화감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황금이란 금속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심어놓은 ‘영화(榮華)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금각사를 나와 청수사로 향해 올라간다.

청수사 가는 길은 양옆에 먹거리 볼거리가 다양하여 시간가는 줄 모른다.
절 찾아 가는 길이 마치 번화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