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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터키 여행

고대 7대 불가사의 아데미 신전과 소아시아 7대 교회 사데 교회[터키 여행 #44]

 

아데미 신전과 사대교회

 

아데미 신전은 리디아 왕국의 크로에수스 왕 시대(BC 6세기경)에는 토속적인 여신에게 제례의식이

행해졌으며, 이 여신이 키벨레(Cybele)로 언급되기도 했다. 아직도 옛 신전터 일부가 잔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신전은 BC 499년, 이오니아 혁명 때 파괴되었고, 동일한 장소에 BC 4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새로운 아데미 신전의 건축이 진행되었으나, 완공되지 못한 채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 신전은 당시 희랍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였으며, 크기는

188m×58m의 규모로 56개의 석주가 들어서 있었다.

 

아데미 신전은 리디아 왕국의 크로에수스 왕 시대(BC 6세기경)에는 토속적인 여신에게 제례의식이 행해졌으며, 이 여신이 키벨레(Cybele)로 언급되기도 했다. 아직도 옛 신전터 일부가 잔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신전은 BC 499년,

이오니아 혁명 때 파괴되었고, 동일한 장소에 BC 4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새로운 아데미 신전의

건축이 진행되었으나, 완공되지 못한 채 현재까지 남아있다.

 

아데미 여신전 유적지 안내판 

 

아데미 여신전 유적지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아데미 여신전 유적지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이 신전은 ‘다산(多産)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장한 규모이다. 지금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석주들이 도열해 있고 특별히 이오니아식의 석주들이 18m나 되는 높이로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채 남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이오니아식 두개의 석주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사데교회 내부

 사데는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지는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붉은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사데교회(아데미 여신전 뒤쪽 한 구석에 위치)

 

아데미 여신전 안내판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이 신전은 ‘다산(多産)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장한 규모이다.

 

아데미 신전은 당시 희랍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였으며, 크기는 188m×58m의 규모로 56개의 석주가 들어서 있었다. 신전 후면의 작은 비잔틴 교회와 연관 지어서 한때 교회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건축이 중단된 채로 남아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의 건축 공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