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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페루

[페루 코스코 3] 산토 도밍고 성당에서 찾아낸 잉카제국의 태양신전 코리칸차의 신비로움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와 태양신전 코리칸차


쿠스코(Cuzco)는 페루 동남부 쿠스코 주, 안데스 산맥 사이에 있는 도시로

해발 3,400m 높이에 위치한다. 43만명(2013년 기준)이 살고 있는 쿠스코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기

이전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잉카제국의 정식 명칭은

타완틴수유(Tawantinsuyu)인데, 제국의 군주를 사파 잉카라 칭한 것을 따서 서양 사람들이

잉카제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타완틴수유는 13세기 초 페루의 어느 고원에서 기원하여

1438년부터 1533년에 걸쳐 무력사용과 평화조약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지금의

에콰도르와 페루, 볼리비아와 콜롬비아의 남부,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북부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타완틴(Tawantin)은 넷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tawa와 그룹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미사 -ntin, 그리고 지역이라는 의미의 수유(suyu)가 결합된 단어이다. 이름 그대로

제국은 네 개 수유로 이루어졌고, 쿠스코는 그 수유의 모서리들이 모이는 곳에 위치했다.

그래서 쿠스코를 세상의 배꼽이라고 하나보다. 쿠스코(Cuzco)라는 지명을 따온 케추아어

커스코(Qusqu)는 아이마라어로 qusqu wanka(올빼미 바위)에서 유래한다. 잉카제국의 신화에

따르면 탐보코 언덕(Tambotoco Hill)에 있는 동굴 파카리탐보(Pacaritambo)에서 태어난

아야르형제 가운데 아야르 오카(Ayar Auca)가 날개를 얻자 미래의 도시를 찾아

이곳까지 날아와서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1200년 경 세워진 도시

쿠스코는 망고 카팍(Manqu Qhapaq)을 시조로 한 제1왕조가 지배했고,

1350년경에는 잉카 로카(Inka Ruq’a)의 제2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꼬리깐차(Coricancha)이자 산토 도밍고 성당


여기는 잉카제국의 가장 최고의 신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신전으로

모두 금으로 덮여 있었다고 전하는 황금의 장소로 잉카시대의 사람들에게있어서

가장 신성한 장소 꼬리깐차(Coricancha)였습니다만 잉카인들로부터 성전을 빼앗아

금을 모두 벗겨 스페인으로 가져가고 신전을 파괴했고 신전의 토대 위에 가톨릭 교회를 세움으로써

잉카 제국의 정복을 과시했다는 태양 신전위에 세워진 산토 도밍고 성당(Santo Domingo)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꼬리깐차의 튼튼한 벽면 위의 건축물을 훼손하지 않은채

그대로 성당을 세웠기 때문에 오늘날 그 형태가 잘 남아있다.


산토도밍고 성당과 코리칸차


쿠스코는 일교차가 큰 편인데 심하면 20도에 이르는 날도 있다.

짐을 찾아 공항을 나올 때는 햇볕이 따끈따끈했지만, 가끔 비도 오고 날씨가 흐릴 때가 있다.

해질 무렵에는 바람막이를 꺼내 입어야 했다. 산토 도밍고 성당으로 갔다. 사실은 산토도밍고 성당보다는

산토도밍고성당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잉카제국의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Coricancha)를 보러 간 것이다.

코리칸차가 유래한 케추아어 쿠리 칸차(Quri Kancha)는 ‘금으로 둘러싼 장소’라는 의미로

원래는 태양의 집이라는 의미의 인티칸차(Inti Kancha) 또는 인티와시(Inti Wasi)라고 불렀다.

코리칸차는 정교하게 계산된 세차운동을 보기 위한 방대한 천문관측장치이자 달력 장치였다. 또한 코리칸차는

창조의 신 비라코차(Viracocha)와 태양신 인티(Inti)에 바친 신전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쿠스코에

들어왔을 때 코리칸차에는 4,000명이 넘는 사제가 봉직했다고 한다. 화강암을 다듬어 세운

코리칸차의 벽은 개당 2kg이나 하는 순금판 700장으로 뒤덮여 있었고, 널따란 정원은 실물크기의

동물과 옥수수밭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금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복도는

그냥 금덩어리가 깔려있었다. 피사로가 이끄는 정복자들이

이것들을 훔쳐서 녹인 다음 본국으로 실어갔다.


코리칸차 중정에 있는 쿠스코 카라 우르미

 

골목을 따라가면 막다른 곳에 태양의 신전이 있다. 협소한 태양의 신전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일부러 축소해서 구석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심지어 잉카의 정신을 훼손하기 위하여

신전을 무너뜨리고 산토도밍고 성당을 지었다. 하지만 신전이 얼마나 정교하고 단단하게 지어졌던지

결국은 포기하고 기단을 살려 성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한편 성당은 돌에 회를 발라 쌓았던 까닭에

두 차례의 지진에 무너졌고, 지금의 성당건물은 1950년에 복원한 것이다. 중정의 한복판에는

쿠스코 카라 우르미(Cuzco Cara Urumi, ‘덮개가 없는 중심석’이라는 의미)가 있던 자리를

나타내는 8각형의 돌궤가 놓여있다. 원래 이 돌궤는 55kg의 순금으로 덮여있었다.



산토 도밍고 성당 회랑에 걸린 식민 초기 기독교 전도과정을 담은 그림들


신전 내부를 돌아보고 나가는 길에 보니 산토도밍고 성당 벽에 그림들이 걸려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제국을 점령한 다음에 원주민들이 기독교를 믿도록 했던 과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종교의식, 특히 인신공양 의식에 대하여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유럽 역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등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야만적이라고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볼 일이다.








태양의 신전 꼬리깐차Korikancha지을 당시

별자리모습






태양 신전의 내부 벽


벽돌 사이로 한장의 종이도

들어 갈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벽돌을 쌓았다.



신전벽에 걸려 있는 황금 성좌도


신전에 들어가면 넓은 광장을 끼고 달의 신전과 별의 신전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태양의 신전으로 가는

좁은 통로가 있다. 신전은 화강암을 깎아지었는데, 홈을 파거나 여기에 맞는 옹이가 달리도록 깎아 맞추었다.

얼마나 정교하던지 몇 차례의 지진에도 끄떡없이 견뎌냈다고 한다. 별의 신전에는 일종의 천문관측을

하던 창이 있다. 창틀을 돌아가면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을 연결하는 실이 교차하는

부위에 목표로 하는 별이 오는 시점을 찾아 농사에 활용했다고 한다.


달의 신전에서던가 벽에 걸려있는 성좌도(Star Map)이 눈길을 끌었다. 본래는 황금덩어리를

망치로 두들겨서 얇게 편 판에 맨 위에 오리온 성좌를 시작으로 일식과 혜성 플레아데스성단, 은하수

등은 물론 태양신과 잉카의 선조의 모습을 새겼다. 잉카의 신전은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여러 개의 각으로

깍은 돌을 쌓는 내진설계를 적용하기도 했는데, 달의 신전과 별의 신전 사이의 통로로 들어가는 문은

이중의 턱을 가진 14각으로 다듬은 돌을 쌓았다. 신전 사이의 벽은 6도 정도의 기울기를

가지고 있고, 이 또한 내진설계의 하나이다.



황금 성좌도를 알기 쉽게

설명한 안내 그림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 지점의 분지를

둘러싼 산 중턱에

흙벽돌로 지어진 오랜 집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신.개축이 불가능하며 .

오랜 도시는 산소가 부족해, 차량들의 연료도 불완전 연소되어 매연이 많다.


오늘날 쿠스코는 잉카 수도와 식민지 도시가 결합된 놀라운 곳이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는 화강암이나 안산암을 정확하게 깎아 만든 담과 담 안으로 배치된 직선형 거리,

태양신 사원(Sun Temple) 유적 등의 인상적인 자취와 그 방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태양신 사원의

황금정원(Golden Garden)은 한때 귀금속 조각작품으로 덮여 있었는데, 스페인 병사들이

카를로스 5세(Charles V)의 금고를 채우기 위해 약탈하였다. 식민지 도시에는 회반죽을

새로 칠한 가옥들과 궁전, 바로크식 교회가 남아 있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플라테레스코(Plateresco) 양식,

무데하르(Mudejar) 양식, 추리게레스코(Churrigueresco) 양식 등

잉카의 전통 양식이 모두 잘 융합되어 있다.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를 배경으로 기념 샷


사실 페루 여행은 스페인 정복 이전의

잉카 제국의 화려했던

문화를 보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