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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행/중 국

[중국여행 베이징 5 ] 자금성의 내정의 정문인 건청문을 지나 내정으로 들어가보다,(건청궁/베이징/중국)

 

자금성

 

 자금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庭)으로 나뉘여져 있다.

    외조는 황제가 정무를 집행하던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남문으로 자금성에 입궁하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인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다.

    외조의 주건물은 태화전(太和殿)과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다. 태화전은 황제의 공식 집무실이고

중화전은 황제가 하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하던 곳, 보화전은 황제의 도서관이고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후기에는 과거시험의 제일 높은

단계인 전시(殿試)를 이곳에서 치렀다고 한다.

 건청문을 지나 내정으로 들어가 보다.

 

 

 건청문(乾清门)은

자금성 내정의 정궁문이다.

청대에 황제가 이곳 어문(御门)에서 정무를 보고 받았다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 있는 건청문(乾淸門) 현판.

왼쪽에는 한자, 오른쪽에는 만주문자로 적혀 있다.

자금성은 크게 황제의 공적 집무공간인 외조外朝

황후를 중심으로 한 사적공간인 내정內庭으로

 나뉘는데 그 경계가 건청문乾淸門이다.

 

保和殿 보화전

앞서 말한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을 합하여 삼대전(三大殿)이라고 부른다.

 세 궁전의 건축을 위하여 1415점의 조각과 1460개의 기둥 1138개의 용머리와 수많은 백옥장식들이

필요했다고 한다. 비가오면 용머리는 배수관의 역활을 하는 것이 재미있다. 삼대전 중 마지막으로 소개할

보화전은 명나라 때 큰 의식을 치르기 전 의복을 갈아입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때는 섣달 그믐,

정월 15일, 귀족과 12품 대신을 위한 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건청궁

 

건청궁 보좌 위의 정대광명이라는 글씨는 순치제의 친필이다. 

옹정제 이후 저 현판 뒤에는 황제가 생전에 후계자를 지명 하여 적어 놓은 봉투가 있었고,

황제 사후 왕공들이 그 봉투를 꺼내 후사를 발표했다. 옹정제가 정한 이러한

후계자 결정 방식을 저위비건법 혹은 비밀건저법이라고 한다.

 

교태전은 원래 명나라 때 중원전이었으나 순치제 때 교태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곳은 황후의 정전 역할을 했던 곳이다. 물론 황후가 공식적인 내명부의 수장이나

실제 집무하기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주로 기능했다.

황후의 생신인 천추절에는 황귀비 이하 황실 내명부와 공주 등의 하례를

 받았으며 매해 황후가 잠신(蠶神)에게 제사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순치제 때 명대 환관(태감)들의 폐단을 경계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곤녕궁

 

청대에 들어 곤녕궁의 역할을 완전히 바뀌었다. 먼저 입구가 남향에서 동향으로 바뀌었다.
곤녕궁은 청조 특유의 샤먼제(사먼제)라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되었다. 즉 아이신기오로씨의

 조상신과 수호신 그리고 티벳 불교의 여러 신들을 모시는 만주족 특유의 제사가 여기서 지내진 것이다.

본래 만주족의 솟대도 여기 서 있었다고 전하나 이후 철거도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궁으로서의 으미도 분명 있어 황제와 황후의 대혼은 여기서

치루어졌으며 강희, 동치, 광서제의 국혼 초야가 여기서 치루어졌다.

즉 내부 공간을 동난각과 서난각으로 나눠서 동난각은 혼례

공간으로 서난각은 제례 공간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御花园 어화원

사실 이 어화원만 다보고나면 자금성 여행은 거이다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어화원은 황제가 달이나

꽃을 감상하던 곳으로 동서 130m 남북 90m 크기인 자금성의 정원이다.

 

자금성의 북문-신무문(神武門) 건너로 보이는 경산(景山)

 

자금성 성벽

 

궁궐 주위의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는 10m나 되며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다.

 

 

 

자금성내 화장실

 

옛날에 중국 화장실은 응아 하면서 옆에 사람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제 그런 화장실은 거의 다 없어졌나보다.
우리나라 화장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神武门 신무문

신무문은 자금성의 북문, 그러니까 마지막 뒷문이다.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었을 때는 현무문(玄武門)이었지만 청나라 때 강희제의 이름을 피휘

신무문으로 고쳤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곽말약이 쓴 '고궁박물원'이라는

 편액이 성문에 걸려 있다.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 이곳을 통해 출궁했다.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된 자금성

 

    1924년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났고 이어 1925년 10월 10일에 자금성은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되었으며

 대외에 개방되었다. 고궁박물관원은1961년 국무원으로 부터 제1진 "전국중점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1987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고궁박물원에는 도자기와 청동기, 진주보석, 서화작품 등 다양한 종류의

진귀한 문물이 도합 105만 2653점이 소장되어 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주석은 천안문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만천하에 선포,

600년간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 24명이 천하를 호령해오던 이곳 자금성은

드디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자금성의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