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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일리노이

[18대 대통령 그랜트의 홈] 미국 18대 대통령이자 장군인 남북전쟁의 영웅'그랜트'의 홈을 방문하다.(Galena/IL)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인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가

부인과 함께 살았던 집을 방문하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북군총사령관으로써, 1865년 남북전쟁을 승리를 이끈 명장이다.

워싱턴 DC의 국회 의사당 앞에 서 있는 말탄 장군의 동상이, 바로 이 그랜트 장군이다.

그랜트 대통령의 집안은 노예제를 반대했고, 그 부인의 집안은 노예제를 찬성해서,

두 사람의 결혼을 서로가 무척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랜트의 사전에는 절대 포기란 없었다고 한다,

 끈질긴 구애끝에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따위는 신경쓰지 않았으며,

매우 금실이 좋은 부부로 알려져 있다.

 

초기  생애

오하이오 주에서 가죽 가공업자 제시 그랜트와 농장주의 딸 한나 심프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랜트는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말을 잘 다루었다.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그랜트에게 아버지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했고 그랜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랜트는 본래 감리교에서 '하이럼 율리시스'(Hiram Ulysses)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이 좋아하는 《오디세이》의 등장인물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따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랜트는 하이럼이라는 이름을 싫어해서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즈 H. 그랜트라고 적곤 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즈음 그의 서류를 제출한 하원의원은 그랜트의 가운데 이름을 잊어버렸고,

대신 그랜트의 외가 성인 심프슨을 차용해 율리시즈 심프슨 그랜트라고 적었다.

그랜트는 이후 줄곧 그 이름을 사용하였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동기들에게 샘 그랜트로 불렸다.

참고 문헌: 위키 백과

 

 

 

여기서 기다렸다가 한 구룹이 되어

안내원의 설명을 들어며 그랜트의 생가를 둘러 보게 됩니다.

 

방문객들이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전쟁터에서의 그랜트 장군의 위용있는 모습

멕시코-미국 전쟁

1843년 그랜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1846년에는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성격이 내성적이던 그랜트는 친구의 여동생 줄리아 덴트와 결혼 후, 아내와 떨어져 있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셔 알콜중독증에 시달렸다. 이로 인하여 그랜트는 1854년에 군을 퇴역하여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갔고, 여러가지 사업에 손을 댔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남북전쟁

1861년남북 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는 다시 준장으로 군에 복귀, 남부군이 차지하고 있던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점령하였다. 여기서 그랜트는 적에게 무조건 항복과 전투 중에 선택하라고 하여

 별명이 'Unconditional Surrender' 즉, 무조건 항복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빅스버그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세우자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를 북부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랜트는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사기가 꺾인 남부군을 몰아붙였으며, 그리하여 1865년에 애포매톡스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16대 대통령 링컨과 함께

정치 입문

링컨 암살 후,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고, 그랜트는 국가군통수 대원수 겸

육군참모총장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존슨은 의회의 탄핵을 받았고 그랜트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눈길을

끌어 1868년 선거에서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37개 주 중 26개 주 (3개 주는 선거권이 없었고,

 8개 주는 호레이쇼 시무어가 가져갔다.)에서 이겼다.

그러나 그랜트는 대통령이 되자 빈부격차와 인종차별 등 극심한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정부 각료들과 그의 비서들이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는 사태와 대규모 금융 스캔들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전쟁영웅인 그의 이미지는 완전히 추락하였으나, 1872년의 선거에서 재선되어 많은

국민들이 의아해 할 정도였다. 당시 그는 37개 주 중 31개 주에서 이겼다.

 

대통령 그랜트의 서제

 

 

피아노도 있는 아담한 서제

 

대통령 침실 치고는 너무나 소박합니다.

 

 

은퇴한 대통령 식탁도 어느 가정 처럼 별난 것 없이 평범합니다.

 

대통령 임기 이후

백악관을 떠난 뒤에는 친구 퍼니낸드 워드가 경영하는 중개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가

사기를 당해 알거지 신세가 되어 1884년 파산 선언을 했다. 같은 해 <센추리 매거진> 지에 남북 전쟁 회고담을

 쓰기 시작해 자서전을 준비했다. 그랜트는 사망 직전에 자서전을 완성했고 그 자서전은 미국 군 역사상

최고의 자서전 중 하나로 평가되며 친구 마크 트웨인과 출판 계약을 맺어 당시 화폐로 50만 달러의

저작권료를 받았다. 1885년 7월 23일 후두암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사망 당시 몸무게는

 108킬로그램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4번째로 뚱뚱했다.

 

주방도 넓지 않고 아담합니다.

 

주방 기구들

빵굽는 기구가 특이합니다.

삼단으로 되어 있는 이 기구는 식빵도 굽고 다른 음식도

할 수 있고 난방도 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다목적 스토브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의 다리미며 석유 램프

우리가 한국 전젱 당시 전기가 부족해 사용하던 석유 램프가 생각납니다.

 

다목적 용도의 특별한 스토브

에너지를 절약하고 여러 용도로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주방 기구입니다.

 

영부인

Julia Dent Grant

 

영부인 줄리아 덴트와는 금실은 아주 좋은 부부로

알려저 있다.

 

 

영부인 동상 옆에서 기념샷

 

영부인 동상 쪽에서 바라 본 그랜트의 홈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1822년 4월 27일 ~

1885년 7월 23일)는 미국의 18번째(1869년-1877년) 대통령이자 장군이다.

 

대통령의 홈은 생각 보다 소박하고 규모는 적었으나 언덕위의

집이라 주위 경관을 바라 볼 수 있는 시야가 탁 트인 2층집이라 시원하고

멋진 아름다운 빨간 벽돌집으로 동화속의 그림과 같은 집이었다.

이 집은 대통령 은퇴후 거주했던 주택입니다.

미국 18대 대통령 그랜트는 미국 지폐 50 Dollars에 있는 초상화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