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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정 오는정

함께 사는 세상

 

 

함께 사는 세상

 

 

 

 

 

 

 

목회수상                             함께 사는 세상                          이용삼 목사

 


   가난은 임금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가난과 부는 역사 이래로 가장 대조되어 온 인간 삶의 두 모습이다. 가난은 언제나 피해자로 그리고 부는 항상 압제자로 군림되어 온 것이 사회의 이분법이다. 가난은 주눅 들게하고, 부는 당당케 한다. 그래서 멀리는 흥부와 놀부를 통해서 부는 악으로 가난은 선으로 표현함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였으며 가까이는 칼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들이 양분을 계급으로 보고 계급타파를 위해 공산당 선언을 한 것이다. 아직은 한국 사회에서는 부자들을 바르게 보질 않는 것도 미국 사회에서와 같은 존경받는 대상되질 못하는 것도 이에 따를 것이다. 오직 욕심쟁이 놀부로만 보기 때문이다.


   고국의 뉴스를 접하다보면 이런 마음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대조적인 상황들이 그랬다는 말이다. 등산용 칼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부동산 소개소에서 벌어지는 고스톱 판에 뛰어들어 판돈 3억 얼마를 챙기고 달아났단다. 신종 부자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바로 같은 날 전세금 마련하지 못해 온 가족 동반 자살한 엄성욱씨의 이야기와 그의 유서를 보면서 묘한 대조가 되었던 것이다.


   유서의 내용이다. “전세금 마련하기 위해 추진하던 일들이 모두 제대로 안 돼 이젠 방법이 없었다. 나 혼자 세상을 떠나려고 생각 하였지만 이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받아야 할 앞날을 생각해서... 천사처럼 착한 아내의 모습도, 홍철 진영이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겠구나. 집 문제 하나도 해결 못하고 온 식구들이 함께 거처할 처소 하나도 마련치 못하는 무능한 가장이구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온 가난이 나에게 대물임 되었고 기적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머물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정치하는 자 경제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어 더 이상 가난한 자의 목을 조르지 않게 되었으면.......


   40세 젊은 나이에 일가족 4명을 데리고 동반자살한 사람의 유서이지만 실은 이 같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 되어 세계에서 자살률이 제일 많은 한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한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전부가 가난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졸부들의 하룻밤 술값이요 고스톱 판돈 값에도 못 미치는 돈이 네 명의 생명을 앗아가게 하는 가난의 아픔이다. 그렇다고 엄성욱씨가 잘 결정했다고는 결코 할 수 없으리라. 다만 그의 죽음과 고스톱 판돈과 비교해서 느끼는 울분일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 경제하는 사람만의 책임이겠는가. 결국 최후의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겠지만 생명에 대한 용기와 위로를 주어야 할 교회가 또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빈부의 차이가 없는 사회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단지 있는 자가 조금은 없는 자들을 돌볼 줄 알고 있는 자에 대한 피압박자라는 놀부의식의 피해에서 보다 내일의 소망과 가난하지만 당당한 인격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말씀에 ‘생활이 찢어지게 가난한 자도 복이 있나니’ 하는 말도 들어 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가령 언덕과 야산을 한갓 산책으로 오르는 것과 히말리야 같은 설봉을 등반하는 것과는 같은 산을 오를 지라도 그 마음가짐과 결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언덕과 야산을 산책으로 오르는 사람들이야 별반 준비 없이도 언제든 오를 수 있다. 책 한권 손에 쥐고도 특별한 각오도 없는 이들이라도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높은 산정을 오르려는 사람은 오랜 연습과 필요한 장비들 때로는 죽음을 각오 하는 비장한 마음 그리고 산을 정복하겠다는 높은 사명감을 가진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때로 인생의 길을 한갖 언덕과 야산을 오르는 듯 적당하게 산책으로 끝내려는 사람들도 있다. 게으른 자들도 무목적의 사람들도 할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먹고 자고 놀다가 죽었다’ 란 묘지 비문에 남길 사람들이다.


   인생은 언덕과 야산만 있는게 아니다. 저 히말라야의 거봉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니 이 거대한 인생의 봉우리를 넘어야 할 설봉에서 눈 속에 빠지고 얼음에 미끌어져 넘어지고 무릎팍이 깨어지고 피가 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사명감 아니고는 넘기가 어려운 봉우리들이다. 그렇다고 일찍이 포기해 버리면 어떻하겠는가. 차근차근 올라가야지. 남산을 오르는 것을 겁을 먹고 포기 한다면 어떻게 한라산을 오르겠는가. 한라산에 기겁을 하고 포기한다면 백두산은 언제 오를 것인가. 백두산을 포기한다면 저 설봉 히말라야는 엄두도 나지 않을 것이다. 남산부터 차곡차곡 오르는 연습을 해야지.


   살다보면 언덕길도 야산들도 그리고 남산 높이서 어려움도 한라산 백두산 심지어 에베레스트도 넘어가야 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예외 없는 것이다. 때로 부자의 돈이 조금은 도움이 된다할지라도 그것만이 필수 장비는 아닐 것이다. 높은 산을 오르는 인생길에 돈이 도움은 된다해도 마지막 열쇠는 아니라는 말이다.


   주일이면 교회마다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회를 한갖 산책으로 나오는 자들 어슬렁어슬렁 슬리퍼를 끌고 와서는 앉아 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등반하는 설봉을 넘겠다는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과는 비교가 될 것이다. 결과는 더욱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정복하겠다는 마음은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을 말한다. 무관심으로 참여만 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십자가를 위해 생명을 담보하겠다는 사명과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면 야산을 언덕을 오르듯 적당하게 믿음 생활하는 자가 어떻게 십자가의 골고다까지 오를 수 있겠는가. 중도에 포기하고 말 것이다. 물론 교회가 설교가 목사가 그 책임을 맡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본인이다. 본인인 엄성욱씨의 책임 또한 면치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몸 바치는 헌신은 어려운 것이다. 은혜를 받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가 열매가 맺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 은혜는 결코 싸구려 은혜가 아니다. 온 몸을 원하는 은혜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이 사회는 같이 거주하듯 적당히 믿는 자와 일생을 헌신하는 믿는 자도 교회에 같이 오는 것이다. 그 신분이 어떠하든 에베레스트의 신분도 야산의 신분도 하나같이 사람 아닌가.


   가난하다고 부자들을 폄하할 필요 없고 부자라고 가난한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듯 야산과 언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괜히 에베레스트를 오른 사람들을 욕할 이유도 없고 설봉을 오른 사람들이 야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야유를 보낼 필요도 없듯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 줄 수 있다면 행복한 사회 아니겠는가. 믿음의 야산을 오르는 자와 믿음의 설봉을 오르는 자들 함께 밀어주고 끌어 줄 수 있다면 행복한 교회 아니겠는가. 그렇게, 그렇게 함께 사는 세상인데.